• 칸옥션 제12회 미술품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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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 053

소현서원 紹賢書院 -

종이에 수묵담채
40.8x35.6cm
액자/추정 KRW 2,000,000-5,000,000
낙찰 KRW 3,100,000

소현서원은 율곡 이이가 주자의 강학 모델을 바탕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해주 석담 石潭에 건립했던 은병정사 隱屛精舍를 모태로 한 서원으로, 율곡을 배향하는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율곡과 관련된 인물들은 소현서원을 방문하여 다수의 시문, 제문, 기행문 등을 남겼고, 율곡학파와 서인계 대표적 인물인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권상하 등의 인물들은 소현서원의 강학, 제향, 유소 활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소현서원은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등을 배향하면서 노론계 서원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이이를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의 형성과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율곡은 1576년 사직한 뒤 자신의 고향인 파주 율곡리로 돌아갔고 처향 妻鄕인 해주 석담에 청계당 淸溪堂을 지었다. 이듬해 1월에는 해주 석담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은거하며 자신의 전범 典範이던 주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후학을 양성하려는 의도로 은병정사를 건립하였다. 석담은 과거부터 무이구곡 武夷九曲과 유사하여 ‘석담구곡 石潭九曲’ 으로 불렸는데 그 중 제5곡에 해당하는 고산석담 高山石潭의 경치가 가장 훌륭하여 강학처 講學處로 삼았다. 율곡은 석담에 정착한 후 주자의 「무이도가 武夷櫂歌」에 착안하여 석담 지역의 경치를 읊은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歌」를 지었다.
1584년(선조 17) 이이 사후 은병정사는 우계 성혼 牛溪 成渾과 해주에 있었던 이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율곡이 생전에 끝내지 못한 주자사 朱子祠 건립에 앞장섰다. 1586년 가을 은병정사 뒤편에 이이의 제자이자 해주 출신인 박여룡 등의 주도로 주자사가 건립되었고 주자, 조광조, 이황이 배향되었다.
주자사 건립 이후 은병정사는 사당 祠堂, 정사 精舍, 강당 講堂, 동몽재 童蒙齋로 구성된 형태를 완성했고 이후 수리나 재건 과정에서도 이 형태를 기본으로 유지하였다. 은병정사는 점차 강학과 제향을 함께 시행하는 서원으로 변하였다. 은병정사는 1593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위기를 맞았는데 이후 1594년까지 성혼이 석담에 체류하며 이를 수습했다. 은병정사의 재건은 1596년 이이를 주자사에 추향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604년경에 마무리되었다. 재건 이후 은병정사를 중심으로 신흠 등을 비롯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점차 확대되었다.
은병정사는 1610년(광해군2)에 박여룡 朴汝龍의 주도로 ‘소현 紹賢’이라는 사액 賜額을 받아 소현서원 紹賢書院이 되었다. 이듬해인 1611년 박여룡과 김장생의 주도로 『율곡집 栗谷集』이 소현서원에서 간행되었으며 이후 이곳에 소장되어있던 『격몽요결 擊蒙要訣』과 『성학집요 聖學輯要』가 목판을 통해 간행되었다. 1699년에는 지촌 이희조 芝村 李喜朝가 소현서원 앞에 요금정 瑤琴亭을 건립하였다. 율곡이 추향된 이후에는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이 차례로 추향되었다. 1871년에는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毁撤되었다가 1950년대 이후에 복원되었고, 현재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7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본 출품작에서는 중심부의 가장 큰 건물이 은병정사이고 우측에 ㄱ자로 보이는 것이 '동몽재 童蒙齋(기숙사)', 가장 북쪽에 있는 건물이 사당이며 율곡이 해주에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인 '청계당 淸溪堂'은 그림의 좌측에, 이희조가 율곡 사후 지은 '요금정 瑤琴亭'은 삼문과 냇가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에서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는 몇 채의 건물들은 천조각 天藻閣, 영사감 榮賜龕 등 당시 서원 운영과 관련하여 지어졌던 건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측에 고산구곡 중 제5곡에 속하는 '철적대 鐵笛臺'라는 층암 절벽이 보이며 '선생가 先生家' 라고 적혀있는 곳이 율곡이 해주로 이주한 후 거주했던 곳으로 보이며 이곳에서 이이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