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옥션 제17회 미술품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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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 013

명재 明齋 윤증 尹拯 1629-1714
서간 書簡
1698년(무인)
종이에 먹
27x97cm
족자/추정 KRW 2,500,000-5,000,000

본 출품작은 윤증이 소론의 거두로 활약한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1629-1711)의 아들인 회은 남학명晦隱 南鶴鳴(1654-미상, 자字 자문子聞)이 정재 박태보定齋 朴泰輔(1654-1689)의 행장을 써 보낸 편지에 답한 내용이다.
박태보는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1629-1703)과 의졸 남일성宜拙 南一星(1611-1665) 딸 의령 남씨(남구만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박세당의 형 박세후朴世垕(1627-1651)가 후사가 없이 죽자 박세후에게 출계하여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擧(1610-1669)의 딸 파평 윤씨(윤증의 여동생)를 양모로 두게 되었다. 기사환국(1689) 때 남인이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를 문묘에서 출향하려 할 때 자신이 부임한 파주에서 이들의 위패를 존속시켰다가 면직되었으며 인현왕후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가는 길에 생을 마감하였다.
윤증은 남학명이 쓴 행장에 대한 짤막한 소감을 남기고 별지에 박태보가 생전에 펼친 행보를 언급하며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써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였다. 편지의 내용에서 윤증이 박태보의 이른 죽음을 깊게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示士元狀草。哽愴不忍讀。文字各有法度。有何可改之處。至於禍故一段。亦深得臣子本心。幽明之間。可謂知己矣。如誌碣。未知可屬於誰。而亦奚待文字。而有所顯晦耶。鄙竟略在別紙。裁察而回敎之如何。戊寅。
사원士元의 행장 초고를 보여 주셨는데, 목이 메어서 차마 읽을 수 없었습니다. 글이란 각각 법도가 있으니, 무슨 고칠 곳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화禍가 일어난 원인을 말한 한 단락 또한 신하의 본심을 깊이 체득한 것이니, 죽은 사람일지라도 지기知己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지와 묘갈은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어찌 글을 가지고 그를 드러나거나 감추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 뜻을 별지에 대략 썼으니, 살펴보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별지]
嘗聞行狀文字。以詳備爲主。不容徑省。如疏章間說話關係緊重者。亦當裁節載入。不可全沒也。今盛文似合於誌碣之體。而爲狀則似略。未知如何。鄙人於士元。論淸城陞黜泮享之疏。所謂崇謙挹守愼重。以匡弼聖質之所偏云者。當時已服其識慮之深遠矣。及後兩賢之罷祀也。其言實驗。所謂一筆抹去。不少持難等語。若合符節。其先見之明。有如是者。又曾於相公閤下燕行之日。聞其所論。蓋以爲我之於彼。只當各守界限。不可有所干請。以撓吾義也。其時亦服其言之正大矣。至於今日。而又大驗。比來於中夜無眠之時。未嘗不起坐歎息。以爲如許見識。世無其比。若使不死。則聖朝必賴其用。而今何可及也。直欲籲天而無從也。至於論征利之弊。實爲當今之極弊。非但一道一邑而已。此等處似當表出而闡明之。未知如何。鄙見所及。不敢自外。有此仰質。還極悚仄。裁諒。幸甚。
... 전략
저는 청성淸城(청성부원군 김석주淸城府院君 金錫胄)이 올린 문묘에 배향하는 인물들을 넣고 빼는 데에 관한 상소에 대해 사원이 논한, “겸손한 덕을 숭상하고 신중한 도를 지켜서 성상의 치우친 기질을 바로잡고 보좌한다.”라는 말에 대해, 당시에도 그 식견과 사려의 깊고 원대함에 심복하였습니다. 그 후 양현兩賢이 출향되었을 때 그 말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른바 “한번 붓을 들어 거침없이 지워 버리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라는 등의 말이 부절을 합치듯 들어맞으니, 그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습니다. 또 일찍이 상공 합하께서 연경燕京에 가시던 날 그의 의론을 들었는데, “우리가 저들에 대해 각각 한계를 지켜야 하고, 저들에게 간청하여 우리의 의리를 요동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도 그의 말이 정대正大함에 탄복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또 크게 증명이 되었습니다. 요즈음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에 일어나 앉아, ‘이런 식견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짝을 찾을 수 없으니, 만약 죽지 않았더라면 조정이 반드시 큰 도움을 받았을 텐데, 이제 이미 늦었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습니다. 곧바로 하늘에 호소하고 싶지만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폐단을 논한 것으로 말하면, 그것은 실로 작금의 매우 심한 폐단으로서, 한 도나 한 고을의 폐단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부분도 드러내서 밝혀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생각이 이와 같은데 감히 남의 일이라고 여길 수 없어 이렇게 말씀드렸으니,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명재선생유고明齋先生遺稿』권20에 「답남자문答南子聞 무인戊寅(1698)」으로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