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옥션 제17회 미술품경매
크게보기

Lot. 040

자하 紫霞 신위 申緯 1769-1847
자하묵연 紫霞墨緣 : 소악부 小樂府 40수
1841년(신축)
종이에 먹
26.3x21.7cm
첩; 포갑/추정 KRW 10,000,000-25,000,000

작품수록처 | 과천시 추사박물관 2016 상반기 특별기획전 ‘자하 신위’ (추사박물관, 2016) pp.80-83

본 출품작은 자하 신위가 쓴 「소악부」 필사본으로 그의 문집 「북선원속고北禪院續稿」 3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藳』 13책에 수록되어 있다.
소악부는 우리 시조를 한시 칠언절구로 번역한 것인데, 시조가 일시적으로 가창되다가 소멸될 것을 우려하여 우리 시가를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소악부는 고려 후기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1287-1367)에 의해 처음 창작되었고, 그 영향을 받아 조선 후기에 자하 신위가 <소악부> 40수를,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1814-1888)은 <소악부> 45수를, 이유승李裕承(1835-?)은 「속소악부續小樂府」 10수를, 원세순元世洵(19-20세기)은 「속소악부인續小樂府引」 17수를 남겼다.
신위의 「소악부」에 수록된 40수의 시 중 작자를 알 수 있는 것은 한호, 이명한, 윤선도, 황진이 등 24수가 있고 작자 미상이 16수이다. 그는 서문에서 "우리의 노래는 자연스럽게 음률에 맞아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이 노래를 시로 채록하지 않으면 없어질 우려가 있다"고 걱정하면서 "우리 나라의 소곡 중에 기억나는 것을 좇아서 칠언절구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는데,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시조를 대상으로 한역한 것으로 보인다.
강화유수 재임기간인 1828년 9월에서 1830년 7월까지 6수를 짓고, 그 뒤 자하산장에 은거하고 있던 1831년 6월까지 34수를 지어 이것을 모두 정리하여 40수를 완성하고 서문을 쓴 것으로 보인다.

출품작에는 병서 부분은 생략되어 있으며 본문 끝부분에 쓴 '자하칠삽삼수紫霞七十三叟'라는 수결로 보아 1841년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장은 두인으로 '홍두주인紅豆主人'과 '옥호매춘玉壺買春' 등 2과를 찍었는데, '옥호매춘'이란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의 제 6 전아典雅의 첫 부분으로 '옥 술병에 좋은 술 가득 담고서' 라는 의미이다.
자하 신위의 소악부 창작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과 애호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악부 창작을 통해 한문학이 당대 구전 시가와 접목되었고, 이를 통해 또 중국적인 전범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 주체적인 한문학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데도 공헌했다. 말과 글이 달랐던 시대에 그 내용을 한시로 번안하여 보존하려 했다는 데 문학사적 의의가 있으며 아울러 사대부의 한시문학이 민간 정서를 수용하는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하 신위의 소악부 창작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과 애호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악부 창작을 통해 한문학이 당대 구전 시가와 접목되었고, 이를 통해 또 중국적인 전범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 주체적인 한문학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데도 공헌했다. 말과 글이 달랐던 시대에 그 내용을 한시로 번안하여 보존하려 했다는 데 문학사적 의의가 있으며 아울러 사대부의 한시문학이 민간 정서를 수용하는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 1.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소악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1 2. 손팔주, 「신자하소악부연구」, 『부산여자대학교논문집』 6,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