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2회 미술품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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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 092

석지 石芝 채용신 蔡龍臣 1848-1941
태호 정영원 台湖 鄭榮源 초상 肖像 외 진주정씨가 晋州鄭氏家 전래 유물 일괄
1927년
비단에 수묵채색 외
129x74.2cm 외
족자 외/추정 KRW 150,000,000-300,000,000
낙찰 KRW 150,000,000

출품작은 석지 채용신이 그린 태호 정영원의 전신좌상 초상화, 정영원의 아들인 농산 정휴탁의 호패, 정휴탁의 아들인 정동환 부부의 전신좌상 초상화 한 쌍, 정영원의 조부인 정면규의 과지 두 점과 정영원이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관복과 신발 등 정영원家의 전래 유물이다.

정영원(1853-1940)은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서大舒, 호는 태호台湖로 1853년 전라북도 고창 삼태에서 태어났다.
충장공忠莊公 정황鄭璜의 후예로, 일찍이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1798-1879)과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1846-1916)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경전에 해박하였다. 바른 학행을 몸소 실천하여 주변에 명성이 높았고, 이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유릉참봉裕陵參奉을 지냈다. 부모를 섬길 때나 선조先祖의 덕업을 받들 때 모두 정성을 다하고 공경하였다. 말년에는 고향에 태호정颱湖亭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는 일로 소임을 다하였으며 1940년 88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전북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472-1번지에 정영원 시은비鄭榮源施恩碑가 세워져 있다.

초상화의 표현법을 살펴보면 잔주름, 요철, 수염 등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였으며 얼굴에 음영도 잘 표현되어 있다.
단학흉배가 새겨진 녹색 바탕의 관복에 전체적으로 선 처리를 하여 관복의 입체감을 살려주고 있으며 배경에 산수화 병풍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채용신 초상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작품 보존 상태가 매우 우수하고 장황 또한 당대 제작된 형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사료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채용신은 1905년 이후 전라도로 낙향하여 어진 화사 출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전라도 지역의 항일운동가 및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여러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이후 전통 초상화법을 토대로 서양화법과 사진의 표현 요소를 직·간접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화법을 구축하고 근대적 초상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를 운영하며 다수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정영원의 초상화 또한 채용신이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며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1 태호 정영원 台湖 鄭榮源(1853-1940) 초상 肖像
출품작은 관복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태호 정영원台湖 鄭榮源(1853-1940)의 전신좌상 초상화이다.
좌측 중앙에 해서체로 '本朝開國五百三十辛酉六月上澣前府使從二品石芝蔡龍臣八十翁移模寫'라고 적혀 있다. 채용신이 1921년 6월 상순에 제작한 작품임을 알 수 있는데 '移模寫' 라고 적혀 있는것으로 보아 기존의 초상화를 베껴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호패에 '癸丑生 丁未入仕'라고 적혀있어 정영원의 생년(1850년)과 유릉참봉에 임명된 해(1907년)가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농산 정휴탁 農山 鄭休鐸(1872-1915) 호패 號牌·칙명 勅命
정휴탁鄭休鐸은 정영원의 아들로, 자는 자경子警, 호는 농산農山이다.
1872년 고창 삼태에서 태어났으며 1903년 주사主事로 서임敍任되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정3품에 올라 1905년 장수군수長水太守를 지냈다. 성품이 본래 청렴결백하여 권귀權貴를 가까이 하지 않고 서책을 애독하여 식견이 해박하였으며 베풀기를 좋아해 궁족窮族을 돕고 향인鄕人을 구제하는데 노력하였다. 위선爲先에 성의를 다하여 선조의 석의石儀를 갖추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였다. 저서로는 『농산유고農山遺稿』가 있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1846-1916)이 쓴 묘갈명이 전한다. 현재 고창 삼태마을에 정휴탁고가鄭休鐸古家가 남아있는데 정휴탁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건립한 것이다.
정휴탁 관련 유물은 호패와 칙명 두 점이 전하는데, 보라색 술이 달린 물소뿔로 제작된 호패에는 앞면에 이름과 출생연도, 관직에 진출한 연도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호패의 발행 연도가 새겨져 있다.

칙명은 광무8(1904)년에 받은 것으로 6품 통훈대부通訓大夫 정휴탁을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3 정동환 鄭東煥 부부 초상 夫婦 肖像
이 작품은 정휴탁의 아들인 정동환鄭東煥과 그의 부인을 그린 부부 초상화이다.
정동환은 무성서원 도내 유림 장의武城書院 道內 儒林 掌議였으나 36세에 낙마 사고로 요절하여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운영을 할 수 없는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정동환이 인촌 김성수 仁村金性洙(1891-1955)에게 거액의 의연금義捐金을 보낸 이력이 있으며 이에 감사의 표시로 김성수가 보낸 편지가 집안에 전하고 있다.

4 노포 정면규 老圃 鄭冕奎(1804-1868) 과지 科紙 2점
정영원의 조부인 정면규鄭冕奎(1804-1868)는 자는 가헌可軒, 호는 노포老圃이다.
정황鄭璜의 후손으로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1798-1879)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아 학행이 뛰어났다. 흥선대원군이 서울에 대보단大報壇을 짓고 만동묘를 헐어 부수자, 영조 때 상주의 이만부李萬敷 등이 만동묘의 훼철을 주장한 것을 들어 그 설치의 의의와 과정 그리고 제향祭享의 의미를 담아 그 부당함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저서로 『노포유고老圃遺稿』가 있는데 기우만奇宇萬의 서문序文과 손자 정영원鄭榮源의 발문跋文을 붙여 목활자본 4권 1책으로 1916년에 간행되었다.

5 태호 정영원 台湖 鄭榮源(1853-1940) 의복·신발 일괄
정영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단령團領과 전복戰服, 사모紗帽, 정자관程子冠 2점, 각대角帶, 목화木靴, 유혜油鞋를 비롯하여 국상 때 입는 삼베로 만든 백단령白團領과 전복, 백사모白紗帽, 각대, 백목화白木靴, 호패號牌 술 등이 함께 출품되었다.
또 관복을 보관했던 관복함官服函과 신발을 보관했던 함이 함께 출품되어 더욱 그 보존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 『고창의 마을 제1집』, 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10